올해 고등학교 3학년부터 본격적인 고교학점제가 시행됐다. 고교학점제란 고등학생도 대학생처럼 원하는 과목을 선택 수강해 누적 학점에 도달하면 졸업할 수 있는 제도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진로와 적성에 맞는 교육과정을 직접 설계해 학생 주도 교육을 실현하게 될 것이다. 대학생만의 전유물이었던 자유롭고 주도적인 학습 설계의 기회를 고등학생도 갖게 됐다. 그런데 고등학생들이 일찍이 경험하게 되는 것은 고교학점제 그 자체만은 아닐 것이다. 매일경제가 종로학원에 의뢰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서울 지역 자사고 10곳은 고교학점제가 도입됨에 따라 평균 100.2개 과목을 개설했다. 반면 1학년 학생 수가 30~60명 수준에 불과한 지방 일반고 5곳의 평균 개설 과목 수는 75.6개에 그쳤다.
결국 고등학생들이 지역·학교 간 격차에서 오는 박탈감 또한 일찍이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학생 주도’가 취지라고는 하지만, 학생이 주도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수업은 여전히 학교와 지역의 수준에 한정됐을 뿐이다. 문제는 이러한 구조적 불균형이 단기적으론 과목 선택의 격차를 넘어서, 중장기적으로는 교육 자원의 편중과 대학 입시 기회의 격차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기존에도 지적돼 온 고등교육 전반에 걸친 불평등이 아래로 대물림되는 구조를 고착화하는 것이다. 그러한 대물림은 아래로는 고등학교 입시, 위로는 다시 대학 입시의 불평등으로 퍼져간다.
학교·지역별 불균형 해소가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고교학점제 도입은 학생들의 주도적 학습을 보장하기엔 충분치 않다. 교육 여건과 자원이 균형 있게 배치될 수 있도록 보다 정교한 행정 지원과 재정 투입이 선행됐어야 했다.
고교학점제는 분명 기존의 획일화된 교육 방식에서 벗어나 학생 중심의 교육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그 이상을 위해서는 형식적 자율성을 넘어선 실질적 형평성이 담보돼야 한다. 특히 고등학교 단계에서부터 시작되는 교육 기회의 격차가 대학 서열화 구조를 공고히 한다면, 고교학점제는 오히려 불평등을 제도화하는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 교육은 계층 이동의 사다리이자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 할 공공재다. 제도 자체가 소수에게만 실질적인 선택권과 기회를 부여한다면, 그 교육의 자유는 특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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