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기 김지원(국어국문학 2018)
68기 김가연(국어국문학 2019)
69기 이태영(행정학 2019)
# 코로나는 대학주보 편집실 풍경을 통째로 바꿔놓았다. 하지만 그 혼란 속에서도 신문은 멈추지 않았다. 전례도 없고 매뉴얼도 없던 그 시절을 김지원(67기), 김가연(68기), 이태영(69기) 세 명의 편집장이 ‘악으로 깡으로’ 버텼다. 오프라인상의 제약이 강해질수록 이들은 대학주보의 ‘디지털 퍼스트’ 기조를 더욱 강화했고, 판형 변경과 콘텐츠 혁신을 도모했다. 코로나 위기 속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던 편집실의 치열한 분투를 돌아봤다.
모든 게 달라졌다
2020년 봄, 코로나의 거센 확산세에 개강이 두 번이나 연기됐고, 캠퍼스는 말 그대로 멈춰 섰다. 그 속에서 66기 이후승(한국어학 2017)으로부터 편집장을 넘겨받은 67기 김지원이 개강호 준비라는 미션을 떠안았다.
언제나 발로 뛰며 취재하던 기자들은 각자의 방 안에 갇혀 모니터로만 세상을 만나야 했다. 편집실엔 단 한 명, 김지원만이 남아 조판을 진두지휘했고, 기자들은 흩어진 자리에서 자기 몫을 묵묵히 해냈다.
김지원은 “코로나가 시작되고 악으로 깡으로 신문을 만들어가는 느낌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대학주보는 70년 역사상 처음으로 3월 30일에 개강호를 발간했다.
하지만 문제는 콘텐츠였다. 코로나 관련 뉴스는 있었지만, 학교에 나오지 못하니 그 외 아이템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전에는 취재처에서 우연히 듣던 이야기들, “요즘 이게 좀 이슈예요” 같은 사소한 힌트들이 기사로 이어졌지만, 비대면 시대엔 취재원과의 라포(상호신뢰관계)도 기대하기 힘들었다.
김지원은 “말조심하던 분들도 살짝 흘려주던 얘기들이 있었는데, 그게 다 없어졌다”고 말했다. 기자들은 방 안에 앉아 “무엇을 써야 하지?”라는 질문 앞에 머리를 싸맸다. 그러다 찾아낸 해답은 하나였다. “질문지를 잘 써보자.”
당시 대학주보 기자에게 질문지는 단순한 준비물이 아니라 취재의 생명줄이었다. 민감한 사안이나 공식적인 취재에만 쓰던 질문지가, 이제는 거의 모든 취재의 출발점이자 전제조건이 된 것이다. 문제는, 누구도 그걸 제대로 써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김지원은 “공식 문서처럼 써오라고 하니까 다들 당황했다”고 떠올렸다. 급기야 김지원은 너무 공격적으로 질문을 쓰는 기자에게 이미 나온 인터뷰 기사를 주며, “이 기사 쓸 때 필요한 질문이 뭐였을까”를 되묻게 하는 역질문 훈련을 시키기도 했다. 어설펐던 질문은 점차 단단해졌고, 기사 하나하나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그 자체로 대학주보의 ‘비공식 매뉴얼’이 돼 갔다.
▲코로나 직전 세미나를 떠난 67기 김지원(맨 앞)과 동료 기자들
‘사고’가 터져도 발행했다
코로나 시대, 기자가 ‘존재한다’는 유일한 증거는 딱 하나였다. 연락이 되는지, 안 되는지. 마감이 다가오면 편집장은 문자, 전화, 카톡을 쉴 새 없이 돌렸다. 김지원이 자신을 스토커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그 자리를 이어받은 이태영도 연락 문제에선 예외가 아니었다. “하루 종일 화만 내더라”는 69기 이현정(국어국문학 2019)의 증언을 보면, 편집장이란 ‘카톡 미응답 공포증’을 앓는 직책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줄 알았지만, 1년이 지나도 상황은 그대로였다. 오히려 5인 이상 집합금지 같은 규제가 생기며 더 복잡하고, 더 어려워졌다. 김가연은 “계속 코로나 얘기만 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아이템은 없고 진짜 난감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어느 날은 진짜 ‘사고’가 터졌다. 2021년 2학기, 이름하여 국제캠 전멸 사태였다. 편집장 이태영을 시작으로 줄줄이 확진 판정을 받았다. 남은 기자들은 접촉자로 분류되어 격리에 들어갔고, 국제캠 편집실은 사실상 셧다운이었다.
그 와중에도 마감은 다가왔고, 서울캠에 남은 데스크 몇 명이 조판의 마지막 끈을 놓지 않았다. 이현정이 사전 조판부터 신문 발간까지 홀로 지면을 끌어냈다. 코로나에 걸린 기자도 예외 없이 기사를 마감했고 감염과 격리 속에서도, 대학주보는 멈추지 않았다.
▲68기 김가연(좌측)과 69기 이태영(우측)이 편집실에서도 마스크를 쓴 채 생활
하고 있다.
‘현장’을 대신한 깊은 취재
하지만 결국 한계에 마주했다. 뉴스거리 찾기는 점점 어려워졌다. 대학주보는 그 벽 앞에서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어차피 다 집에 있는데 공부해서 쓸 수 있는 기사를 써보자, 그렇게 대학주보는 연재 형식의 기획 기사들을 하나둘 시도하기 시작했다. ‘깊이’로 승부를 보자는 전략이었다. 기존 베를리너 판형에서 타블로이드로의 전환은 기자들에게 새로운 실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줬다. 더 작고 간결해진 지면은 오히려 긴 호흡의 분석 기사를 담기에도 적절했다. 기자들은 사라진 ‘현장’ 대신 깊이 있는 시선을 택했고, 기획은 어느새 대학주보의 또 다른 얼굴이 돼 갔다.
청년 정치 연재기획, 학생 자치 연재기획, 5·18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기획 등 이 시기 탄생한 굵직한 기획들이 그 흐름의 연장이었다. “취재처를 안에서 찾을 수 없다면 밖으로 돌려보자”던 68기 김창호(언론정보학 2019)가 들고 온 주제는, 수술 중 사망한 권대희 씨 사건이었다.
“우리가 이걸 다뤄도 될까?”하고 망설였던 김지원이 김창호의 집요한 설득 끝에 함께 취재에 나서게 됐다. 그 기사는 단순히 사건 자체를 다루기보다 권대희 씨 어머니의 이야기를 다루는 등 다층적인 시각으로 구성됐고, 김지원은 “나중에는 김창호 기자한테 고맙다고 얘기할 정도로 많은 감정들을 느끼게 해줬던 취재였다”고 회상했다.
67기 김수혁(철학 2016)은 “코로나 시기였기에 어떻게 보면 기존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태영은 “학생 기자라는 틀 안에서 움직일 필요는 없구나라는 깨달음을 줬던 기사였다”며 “기성 언론이 팔로우업하는 걸 보면서 학생 매체도 이슈를 선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전했다.
유일한 ‘현실’이었던 편집실
‘학보사 활동’이라 하면 떠올리는 워크숍, 회식, 팀워크 같은 낭만은 없었다. 김지원은 “활동을 통해 끈끈한 동기애를 느낀다거나, 워크숍에서 추억을 만드는 게 힘들었다”며 “그저 기사를 ‘뽑아내는 존재’처럼 느껴졌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애정이 싹트기도 전에 무거운 책임부터 맡게 된 수습기자에게, 그 시기는 꽤 가혹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떠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남은 사람은 있었다. 이유는 저마다 달랐지만, “코로나라 갈 곳이 없었다”는 말이 가장 솔직하면서도 정확했다. 수업은 비대면, 친구는 못 만나고, 결국 유일하게 열려 있던 곳은 편집실뿐이었다. 함께 밥을 먹고, 공부하고, 마감을 하다 보니 어느새 대학주보는 과 생활이자 사생활처럼 자리 잡았다. 김가연은 “편집실에서 함께 온라인 강의를 들은 기억이 난다”며 “마이크 켜진 줄 모르고 말을 걸었다가 깜짝 놀라기도 하고, 동기가 발표하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기도 했다”고 떠올렸다.
수많은 활동이 멈춘 가운데서도 대학주보만은 계속해서 돌아갔고, 그 안에서는 일상이 이어졌다. 일반적인 대학 생활에서 벌어질 만한 일들이 편집실에서 펼쳐졌다. 그래서 이들에게 대학주보는 생활양식에 가까웠다. 그 시절 편집실은 기자들의 일상과 관계, 책임이 촘촘하게 뒤섞여 눌러 붙은 공간이었다. 말하자면, 유일하게 현실 같았던 세계. 바로 삶의 중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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